트라우마 치료 중인 노동자들에 ‘출근 강제’한 한전KP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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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일 취재를 종합하면, 한전KPS는 지난 3일 ‘1차 트라우마 치료기간 종료 및 작업재개 시행 알림’이라는 공문을 보내 김씨의 동료 하청노동자들에게 업무 복귀를 명령했다. 다음날 김씨가 소속됐던 재하청업체인 한국파워오엔엠은 “한전KPS 태안사업처 공문 및 한국파워오엔엠 본사의 요청에 따라 7일부터 정상 출근을 요청한다”고 직원들에게 공지했다.
앞서 한전KPS는 ‘태안화력 고 김충현 비정규직 노동자 사망사고 대책위원회’와의 협상 과정에서 “정부 가이드라인만 있다면 정규직 전환에 협조하고, 트라우마 치료에도 적극 협력하겠다”고 했다. 고용노동부 서산출장소는 지난달 5일 한전KPS와 협력업체에 트라우마 치료를 위해 조치를 취하라는 공문을 보냈다. 노동부 산하 산업안전보건공단에서 6월 말부터 집단·개별 상담이 시작됐다.
김씨는 지난달 2일 충남 태안화력발전소 내 기계공작실에서 기계에 끼여 사망했다. 대책위에 따르면 한국파워오엔엠 소속 25명, 삼신 소속 13명의 동료 노동자들은 김씨 사고 장면을 목격한 후 큰 충격을 받았다. 이들은 상담 결과 고위험군 15명, 일반군 21명 등으로 판정받아 트라우마 치료를 받고 있다.
트라우마 치료 프로그램은 심리안정화, 위기상담, 집단상담, 복귀 전 심리·정서·행동 평가 등 5주 이상 진행되는 전문 과정이다. 특히 7일부터 본격적인 ‘위기상담’ 과정에 들어갈 예정인데, 개별 위기상담이 시작되기도 전에 한전KPS가 업무 복귀 명령을 내린 것이다.
대책위는 동료가 사망한 일터로 복귀하는 것은 사고 트라우마를 자극할 수 있어 복귀 시점은 당사자들의 상태를 충분히 고려해 결정돼야 한다는 입장이다. 대책위와 한전KPS 비정규직 노조원들은 지난 4일 밤 노동부 서산출장소 점거 농성에 돌입해 노동부에 작업 중지 명령을 내릴 것을 촉구했다. 대책위는 “한전KPS 태안사업처의 지시는 피해 노동자들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는, 비용과 효율만 앞세운 처사”라고 했다. 노동부를 향해서도 “중대재해 이후 트라우마를 겪는 노동자들의 회복을 외면한 채 일방적으로 업무 복귀를 명령하는 사업주 행태를 방조하고 있다”고 했다.
대책위는 지난 5일 오후 서산출장소 앞에서 집회를 열고 한전KPS와 노동부를 규탄했다. 이들은 “중대재해 이후 트라우마를 겪는 노동자들에 대한 심리적 회복 조치가 제대로 진행되지 않은 상황에서 현장 복귀를 강제하는 것은 명백한 2차 가해”라고 했다. 또 “서부발전과 한전KPS를 고발한 뒤에 일어난 명백한 보복 조치”라고도 했다. 앞서 대책위는 지난 3일 원청인 한국서부발전과 한전KPS를 중대재해처벌법과 산업안전보건법 위반 및 업무상과실치사 혐의로 노동부와 경찰에 고발했다.
대책위의 강한 반발로 한전KPS는 5일 저녁 업무 복귀 명령을 취소하고 8월29일까지 트라우마 치료기간을 보장하기로 했다. 임금과 복리후생에서도 불리한 처우를 하지 않기로 했다. 회사가 위와 같은 사안을 이행하지 않으면 노동부가 행정명령과 작업 중지 명령 등으로 지도한다. 이태성 대책위 언론팀장은 “노동자들이 온전하게 치료받고 현장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한전KPS는 약속을 이행해야 한다”고 했다.
무심한 듯 슴슴한 너. 무더운 여름이면 늘 생각나는, 나직하게 불러보는 그 이름. ‘평양냉면’이다. 이처럼 무구하고 질박한 맛의 음식도 없을진대, 이처럼 예송논쟁 저리가라할 번잡스러운 설전과 갈등을 빚어온 음식도 없다. 메뉴 자체로 장르가 된 음식. 탐구와 분석의 대상이 되고 계보도까지 거느린 평양냉면은 단순한 먹거리 이상의 무엇이다.
‘무심한 듯 슴슴한 너’는 페이스북에 기반한 평양냉면(이하 평냉) 동호회 이름이다. 2013년 개설돼 5100여명의 ‘평냉인’을 보유하고 있는 이 모임은 집단지성의 힘으로 전국 방방곡곡 냉면집의 현황과 각종 정보가 실시간 집대성되는 아카이브이기도 하다. 개설자인 김지인씨(그램퍼스 대표)는개성 출신인 외할머니 손에 이끌려 유년기때부터 40년 이상 평냉에 길들어 온 마니아다. 김씨를 포함해 김성준씨(국순당 해외사업부장), 정성익씨(바 801 대표), 이한주씨(디지털터빈 한국지사장), 김종혁씨(모리사와 코리아 대표), 전효재씨(온육집 대표) 등 6명의 평냉인이 지난달 25일 서울 청담동 냉면집 우주옥에 모여들었다. 우주옥은 올 상반기 평냉마니아들 사이에 ‘핫하게’ 떠오른 곳이다. 맑고 깔끔한 육수에 100% 메밀로 반죽한 면, 그 위에 수비드한 홍두깨살을 고명으로 올린 맛과 감각으로 입소문이 났다. 지디가 만든 피스마이너스원 하이볼 같은 ‘힙한’ 평냉이라나 뭐라나. 평냉에 소주 한 잔. 늘상 먹는 평냉이지만 언제나 기대감으로 설렌다는 이들의 평냉이야기에 귀 기울여봤다.
무심하고 슴슴한 그 맛이다. 외양도 수수하다. 하지만 한 그릇의 냉면이 만들어지기까지 인고의 시간과 노력이 있다. 고기를 삶아 맑은 육수를 만들어야 하고 메밀의 양을 적절히 배합해 반죽한 뒤 면을 뽑아내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 단순하고 순박한 모습 이면엔 생각지 못한 미학적 여정이 숨겨져 있는 것이다. 때문에 여름철만 되면 ‘냉면값이 비싸다’는 관성적 지적들이 나오는 게 가슴 아프다. 냉면은 비쌀 수밖에 없는 음식이니 말이다.
평냉은 첫입에 매료되기는 쉽지 않다. 어찌 보면 소설 ‘어린 왕자’ 같다. 스무 살 때, 서른 살 때, 또 쉰이 되어 먹을 때마다 맛이 다르다. “기뻤을 때, 마음이 안 좋을 때, 혹은 소주와 곁들일 때. 먹는 상황과 기분에 따라 맛이 달라져요. 이렇게 지루하지 않은 음식은 아마 평양냉면밖에 없지 않을까요.”
‘면스플레인’이라는 말은 평냉 때문에 나왔다. 이렇게 먹어야 한다, 진짜 평냉은 이런 거다… 위작 여부를 감정하듯 평냉의 정체성을 두고 왈가왈부 설왕설래가 오랫동안 이어졌다. 하지만 2018년 남북정상회담 당시 공개됐던 옥류관의 평냉은 남한의 수많은 마니아를 충격에 빠뜨렸다. 달아오르던 면스플레인도 주춤해졌다. 대신 평냉을 즐기는 인구는 크게 늘었다. 이때를 기점으로 동호회 회원 수도 1000명대에서 3000명대로 껑충 뛰었다.
“엄밀히 말해 남한에 있는 평냉은 ‘서울식 냉면’으로 불러야겠죠. 진짜 평양냉면이라면 북한 고려호텔에서 요리하던 분이 만드는 서초동 설눈을 꼽을 수 있겠네요. 북한 출신 요리사들이 많지만 가장 최근까지 북한에 계셨던 분이거든요.”
마트에서 파는 사리와 동치미 육수를 사서 뚝딱 말아먹는 평냉. 평냉인 입장에선 평냉을 먹은 것으로 칠 수는 없다. 평냉의 핵심은 면장과 육수 내는 이의 손맛이다. 매장에서 면을 뽑아 삶아내는 자가제면은 기본이다. 냉면을 주문한 뒤 작동하는 제면기 소리에 흥분과 기대감이 솟구치기 시작하는 것은 평냉인으로서 포기할 수 없는 즐거움이다. 메밀 100%를 내세우는 곳들도 있지만 전분을 배합해 식감을 차별화하는 것은 점포마다 고유 스타일이므로 절대 기준은 없다. 한때 메밀 원산지를 두고 몽골산, 미국산, 국내산을 따지는 열정이 휘몰아치던 시절도 있었다.
일반인들에겐 여름철이 익숙하지만 평냉인은 때를 가리지 않는다. 평냉을 먹으러 갈 때의 마음가짐도 조금은 달라진다. 제육볶음, 돈가스, 짜장면으로 한 끼 때우러 갈 때와는 다른, 특별한 무언가를 향한 기대감이랄까. 하지만 혼자 가야 할 때가 많은 외로운 음식이기도 하다. 대중적이지만 대중적이지 않은 음식이어서다. “손님을 모시고 유명한 평냉집에 간 적이 있어요. 말로는 좋아한다고 하시던데 막상 나오자 몇 젓가락 뜨고는 안 드시더라고요. 그때 느꼈던 안타까움과 아쉬움 말로 다 못 하죠. 그래서인지 친한 사람 아니고는 권하지 못하겠어요.”
이들에게 평냉은 한끼가 아니다. 가꾸고 다듬어 발전시켜야 할 사회적 자산이다. 종종 주말이면 서너 군데의 평냉집을 돌며 자신들이 사랑하던 맛이 유지되는지 살피기도 한다. 육수의 염도와 온도, 면의 상태는 물론이고 만두의 완성도도 꼼꼼히 체크한다. 하루에 네다섯 군데를 찾아 평냉을 먹기도 한다는 김지인씨는 “팬데믹 전 몇 년간은 리크루팅 사이트를 검색해 오픈을 앞둔 평냉집의 구인 공고를 확인한 뒤 누구보다 빨리 오픈 날짜에 맞춰 먹고 다닌 적도 있었다”고 말했다. 김종혁씨도 “새로운 곳이 생겼다면 제주까지 찾아다녔는데 어느 순간 활화산처럼 늘어나 실시간 쫓아다니는 것은 포기했다”며 웃었다.
평냉은 장충동, 의정부, 우래옥 계열이니 하는 나름의 계보를 갖고 있다. 피란민들에 의해 남한에 정착하고 전수된 음식이다 보니 1세대 노포의 전통이 어떻게 이어졌는지, 그곳에서 일하다 파생·독립한 점포는 어디인지, 새롭게 등장한 곳은 어떤 전사(前史)를 가졌고 잠재력을 드러내는지 등은 맛과 함께 평냉인들이 관심을 두는 주요한 서사다.
“이런 냉면 맛도 모르는…” 평냉을 즐기지 않는 사람들을 질색하게 만드는 면스플레인의 전형이다. 비빔냉면을 먹겠다면, 혹은 좀 새콤달콤한 육수 맛의 물냉면을 고르면 어김없이 날아드는 말. 심지어 계열이 다른 평냉을 선택했다고 이런 비난이 오가기도 한다. 뿐인가. 가위질하면 안 된다, 겨자를 뿌리면 안 된다, 쇠젓가락으로 먹으면 안 된다는 갖은 ‘꼰대스러운’ 주장도 있지만 입맛에 맞게, 원하는 대로 먹으면 된다는 것이 이들의 이야기다.
단 하나. 평냉인이라면 ‘완냉’을 해야 한다는 일종의 법칙은 있다. 이는 면은 물론 국물까지 완전히 마셔 발우공양하듯 깨끗이 비워내는 것이다. 완냉되지 않았음은 평냉에 대한 실례이자 더할 나위 없는 혹평이기도 하다.
폭염이 시작된 지금, 어느 냉면집으로 가볼까. 이들이 즐겨 찾는, 추천할만한 곳들을 물었다.
경평면옥(삼성동)/반죽이 안 되면 문을 닫는 장인정신·하루 딱 300개만 빚는 만두·고객의 테이블을 세심하게 관찰하는 서비스, 광평(삼성동)/한식의 대가가 선보이는 차원 높은 맛·테이블마다 놓인 다시마초도 놓치지 마시길, 서관면옥(서초동)/단메밀과 쓴메밀을 블렌딩해 만든 냉면·점심특선 서관면상 강추, 양각도(일산)/원재료의 특성과 소금 등 조미료의 성분을 분석해 맛을 조합한 정성과 감동이 느껴지는 음식들, 을밀대(일산)/해외에서도 생각나는 냉면의 맛·변함없는 맛과 품질을 유지하는 곳, 진미평양냉면(논현동)/전체적으로 조화로운 맛과 기본기·9년째 미쉐린 빕구르망, 평양면옥(장충동)/평양냉면의 기준 아닐까·술안주로도 이곳 육수가 최고, 평안도 상원냉면(동교동)/제주산 메밀만 쓰는 손꼽히는 집·제육과 편육, 맛보기면까지 훌륭.
지난 6월 20일 <케이팝 데몬 헌터스> (KPop Demon Hunters, 이하 ‘케데헌’)가 공개되었다. 케데헌은 미국의 소니 픽처스 애니메이션이 제작한 애니메이션 영화로, 넷플릭스가 배급을 맡았다. 장르는 뮤지컬, 판타지, 코미디. 제목에서 드러나듯 한국의 케이팝 아이돌이 악귀를 잡는 헌터로 활약한다. 케데헌은 넷플릭스 글로벌 1위를 차지하고, SNS에서는 감상과 2차 연성이 쏟아지고, 영화의 OST까지 빌보드 차트와 스포티파이의 글로벌 차트에 높은 순위로 진입하는 등 흥행을 이어가고 있다.
케데헌은 우선 매력적인 캐릭터와 중독성 있는 노래, 그리고 한국적 요소를 섬세하게 조합했다. 케데헌의 세계관에서 춤과 노래로 악귀를 물리치는 ‘헌터’는 한국의 무당이 기원으로, 매 시대 새로운 헌터들이 발탁되어 황금빛 결계 ‘혼문’을 쳐서 귀마로부터 세상을 지킨다. 2025년의 헌터인 ‘헌트릭스’는 3인조 걸그룹으로, 루미와 조이, 미라가 멤버이다. 세계적인 걸그룹인 헌트릭스는 신곡 ‘골든’으로 혼문을 완성 시키기 직전이다. 실력, 팀워크, 직업에 대한 열정, 팬들을 향한 사랑, 무엇 하나 빠지지 않는 헌트릭스는 그야말로 완벽한 ‘우상’이다. 후술하겠지만, 케이팝의 문법을 정밀하게 차용한 캐릭터들은 곧바로 마음속을 파고든다. 혼문이 완성되면 귀마는 소멸되는데, 이를 저지하고자 귀마의 수하 ‘진우’는 보이그룹 ‘사자 보이즈’로 데뷔한다. 사자 보이즈는 전원 저승사자로, ‘사자’라는 동음이의어를 노려 사자 로고를 쓴다. 사자 보이즈는 어둠의 에너지로 팬들의 마음을 현혹하고, 헌트릭스 멤버들이 감추고 있는 불안과 콤플렉스를 자극해 팀의 분열을 초래한다. 헌터-선(善)-혼문, 저승사자-악(惡), 귀마의 대립 구도와 정체를 감춘 영웅이라는 익숙한 서사는 빠르게 케데헌에 몰입하는 레드카펫을 깐다.
영화의 곳곳에는 ‘케이팝 아이돌’로서 헌트릭스의 한국인 정체성이 익살맞게 녹아 있다. 일단 ‘엄청나게 열심히’ 하고, 이동 시간이 많은 아이돌답게 김밥과 라면을 즐겨 먹고, 기운이 떨어질 땐 뜨끈한 국밥을 먹으러 가며, 멤버끼리 친목을 다지는 방법은 목욕탕에 함께 하는 것이다. 식당에서 수저 밑에 휴지를 깔거나, 아트박스의 향기가 물씬 풍기는 편지지 디자인 같은 디테일은 이마를 치게 만든다. 민화 스타일의 까치와 호랑이는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헌트릭스가 사용하는 무기는 한국의 전통 무기와 문양을 참고했고, 저승사자 아이돌은 갓끈으로 팬들의 마음을 튕기며, 이정표가 될 만한 건물과 목욕탕 로고 같은 지역성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한국의 공간적 특수성을 살렸다. 멋진 남자가 나오는 순간 깔리는 ‘자자~선수 입장~’ 같은 느낌의, 혹은 ‘지금부터 얘네 둘이 중요합니다~’를 암시하는 BGM은 너무나 한국 드라마의 그것이라 웃음이 나온다. 문화 감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공감인데, 한국 문화의 세계 진출과 꾸준한 노출로 인해 이 모든 ‘어, 나 이거 알아!’의 재미는 비한국인 감상자에게도 익숙한 코드가 되었다. 즉 케데헌의 성공은 한국인 이주민의 역사부터 한류-케이팝 열풍으로 이어지며 오랫동안 응축되었던 에너지가 문화의 영역에서 소비를 넘어 생산과 창조의 영역으로 전환되었다는 지표라고 할 수 있다.
케데헌의 한국적 요소가 이처럼 생생하고 적절한 것은 제작 과정에서 참여한 한국계 제작자들의 노고가 있어 가능했던 듯 하다. 감독 매기 강은 5살 때 이주한 한국계 캐나다인이며, 아트 디렉터로 참여했던 제작자는 공개 직후 다양한 비하인드를 SNS에 공개하며 소통했다. 이주민으로, 이방인으로, 그리고 오랫동안 문화적 주변부로 고군분투했던 이들의 경험과 열정이 제작 과정에서 일종의 혼문을 결성하여 여러 위기를 막아낸 셈이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스테레오 타입의 아시안이 브릿지 염색을 하고, AI 영상이 만든 것과 별 차이 없는 해괴한 행동을 했는가. 당신들이 헌트릭스입니다. 이러한 제작자들의 존재는 혼종적 정체성의 루미나 한국인이지만 외국에서 자란 조이와 겹쳐진다. 루미는 헌터이지만, 헌터의 적인 어둠을 동시에 몸에 지닌 채 태어났다(오늘날 다국적 사회가 된 한국의 상황이나, 퀴어 정체성 같은 소수자성으로도 읽을 수 있다). 대대로 이어진 혼문은 순결한 황금색이었다. 이전 세대의 헌터이자 헌트릭스를 키운 ‘셀린’은 “헌터는 두려움도, 슬픔도, 고통도 감추어야 한다”라며 강하게 훈육하고, 루미의 정체를 세상으로부터 감추게 한다. 혼문은 그렇게 어둠과 악귀를 더럽고 흉측한 것, 척결해야 마땅한 것으로 규정하고 때려잡으며 만들어졌다. 루미는 혼문의 일부이지만, 완전히 하나가 될 수는 없는 운명이다. 자신 안에 있는 ‘다름’, 그 이질성이 온전한 동질성과 결합의 세계에 균열을 낸다. 미라와 조이가 헌터로서 악귀를 혐오할 때마다, 누구보다 미라와 조이를 사랑하는 루미는 점점 더 그들과 유리된다. 그리고 진우를 통해 악귀가 완전히 다른 괴물이 아니라, ‘자신 안의 어둠’에 잡아먹힌 누군가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사람이었던’, 그러니까 언젠가는 ‘나’였던 존재와 직면하면서 루미는 망설이기 시작한다.
케데헌의 또 다른 매력은 케이팝의 적절한 활용이다. 귀여운 얼굴의 멤버가 저음의 파워풀한 랩을 구사하는 반전이든가, 가학성 있는 미션을 예능에서 하고 뜬금없이 애교를 부린다거나, 처음에는 청량한 컨셉으로 데뷔했다가 컴백은 치명적인 섹시 노선을 타는 보이그룹의 여정은 케이팝의 얼 그 자체다. 무대 연출 또한 전문적이다. 헌트릭스와 사자보이즈의 무대는 무대 디자인부터 멤버들의 퍼포먼스, 화면 구도, 조명, 연출 등이 모두 케이팝 그 자체라는 찬사를 받을 만큼 높은 완성도로 구현되었다. 합동 팬사인회라든가, 선배 그룹의 불화를 자신들의 홍보에 사용하는 어그로 등은 만화적 허용으로 웃어넘기자. 케데헌의 감독 매기 강은 케이팝 아이돌의 기원으로 무속인을 선택한 이유를 “음악과 춤으로 요괴를 물리치는 굿”에서 공통점을 발견했다고 설명하며, “무당이 거의 여성”이기 때문에 여성 영웅 서사와 이어진다고 보았다. “굿이 최초의 콘서트가 아닐까”라는 감독의 말은, 무속의 역할을 생각하면 매우 설득력 있다. 학술적 관점에서 무당은 종합예술인이자 치유자로, 의학도 과학도 충분한 해결책이 아니었던 시대 공동체의 아픔과 위기에 공감하는 존재였다. 한편 춤과 노래를 천시하는 문화는 대중 가수와 대중 음악을 저급한 것으로 취급하는 데까지 확장되었다. 케이팝은 10여년 전까지만 해도 ‘어린 애들이나 좋아하는’, ‘생각없이 노래하는 인형들의’, ‘질이 떨어지는’ 장르 취급을 받았다. 케이팝과 무속의 연결은 한국적인 요소를 살리는 동시에, 주변화되었던 ‘여성-종합예술가’가 예술로 사람들의 마음을 치유하고 연결한다는 서사를 완성한다.
치유와 연결. 케데헌에서 주요 서사에서, 세상을 지키고 혼문을 만는 것은 곧 음악을 듣고 즐기는 사람들의 ‘마음’이다. 케이팝 아이돌을 사랑하는 경험이 개인의 세계를 넓히고, 또 취향의 공동체를 결성한다는 간증(?)은 이미 풍부하다. 헌터는 칼을 들고 악귀를 무찌르지만, 궁극적으로 사랑이 중요하다는 메시지가 케데헌을 관통한다. 진부하다면 진부하지만 빛바래지 않는 진실이다. 사자 보이즈의 노래는 개개인의 마음속 약한 지점을 자극하고, ‘나만이 너의 안식처가 될 수 있다’, ‘나만이 너의 구원자’라며 파괴적인 몰입을 요구한다. 불안을 해결해줄 테니 의탁하고 편해지라는 유혹이다. 방향성은 다르지만 이는 이전 세대의 혼문이 추구하던 바와 유사하다. 어둠과 두려움을 악귀로 치환하고, 타자화하며, 그것만 때려 부수면 아름답고 맑은 황금빛 세계가 있다는 환상. 그러나 혼종적 정체성인 루미뿐 아니라, 미라와 조이 역시 언제든 자신도 악귀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직시한다. 헌트릭스가 어둠을 받아들이고 새로운 혼문을 만들기 위해 하는 노래는 그래서 다르다. “흉터는 나의 일부야”, “왜 내 머릿속에 갇힌 색깔을 숨겼을까? 내 결점이나 아픔이 빛을 볼 수 있게 해야 했는데.” 추하고 부족하고 혐오스럽고, 부서지고 깨어진 모습조차 감추지 않고 ‘나’임을 받아들일 때, 헌터는 완전무결한 신적 존재가 아니라 불완전하고 흠결 있는 인간으로서 타인과 연대하고 연결된다. “우린 영웅은 아니지만, 모두 혼자가 아니야.”
진지하게 사천 자 정도를 썼다. 속마음은 소니 앞으로 트럭을 보내고 싶을 뿐이다. 제작진의 노고에 충분히 보상하고, 케데헌을 시리즈로 만들어 달라. 헌트릭스의 1년 2컴백을 보장하라. 이전 세대 헌터들의 서사를 풀어달라. 사자보이즈의 샵을 바꿔달라. 그들이 삽살개나 도깨비 같다는 팬들의 의혹에 해명하라. 까치(서씨)와 호랑이(더피)의 활동을 보장하라. 아무튼 가진 것 다 내놔라.
<이진송>
젊은 날 체계적이지 못해 사방으로 흩어진 밥풀처럼 난삽하기 그지없는 세상 공부다. 밥은 먹으면 부르고 술은 마시면 취한다. 이건 명백한 부작용이다. 수불석권(手不釋卷)하라는 선친의 가르침이 있어 옆구리에 책은 하나 끼고 다녔다. 문지방이 닳도록 호프집을 드나들던 시절, 어느 날 헌책방에서 만난 네 글자가 뒤통수를 때렸다. <꿈꿀 권리>. 가스통 바슐라르.
저 높은 곳의 달. 그곳에 누가 있어 지구의 후줄근한 나를 본다면, ‘넌 왜 아직도 거기에 거꾸로 매달려 있니?’ 하고 추궁하지는 않을 것이다. 여기는 서로가 서로를 정중하게 받드는 상대성의 세계. 여기에 중심은 없다. 없어서 없는 게 아니라 모두가 중심이라서 굳이 중심은 없다는 것. 철석같은 나를 배제한 절대 객관의 세계가 절실하게 궁금해서 그것에 대한 생각을 이리저리 굴린다. 요즘 AI가 대세지만 이 또한 IT의 일환이다. 겸손하게 소문자로 옮기면 it, 그것이 아닌가. 이러니 이런 제목에 어찌 마음이 휘어지지 않겠는가. <그대가 그것이다>. 스리 싯다라메쉬와르 마하라지.
책 하나 세상에 내보낼 때 끝까지 고민하는 건 제목이다. 이젠 아득해진 결혼이나 첫돌도 반지가 있어 반짝거리는 것처럼 똑 떨어지는 제목이 책의 운명을 좌우한다. 이 짧은 글에서 언급되는 책들은 실은 나의 지력으로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난공불락의 목록이다. 그래도 얄팍하게 잔머리를 굴려 제목만으로 나를 진창에서 구해준 책들. 그리고 이런 고마운 제목도 빼놓을 수 없다.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 피에르 바야르.
최근 궁리출판의 명민한 젊은 편집자를 통해 한 사상가를 알게 됐다. 나의 안목이 문제였지, 이미 널리 읽히는 뜨거운 저자였다. 스핑크스의 통찰에 따르면 인간은 저녁이면 지팡이에 의지해서 세 발로 걷는 짐승이다. 지구는 시시각각 매우 빠른 속도로 팽팽 돌고 있다. 이제껏 나는 지구에 타지 못하고 그 바깥을 떠돌며 방황하는 중이었다. 이제 현명하게 허리를 굽혀 아래를 향해, 지팡이를 브레이크 삼아 마구 내달린 삶의 속도를 달래며, 지구의 아늑한 좌석에 탑승하는 것, 내 무덤 속으로! 이런 생각에 힌트를 준 제목은 이것이다. <지구와 충돌하지 않고 착륙하는 방법>. 브뤼노 라투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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